삼위일체(三位一體)에 대하여
삼위일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한 하나님이신 동시에 각 위의 역사에 차이가 있음을 알려주는 기독교의 기본 교리이다.
서 론
본 지면에서는 삼위일체를 통해 기독교가 나아가야 할 종말적인 노선을 증거하려 한다. 2천년간 많은 신학자들이 삼위일체를 논해왔지만 은혜시대에 논해지던 변론으로서는 <여호와>라는 위대하신 하나님의 이름 영광을 가리우려는 마귀의 간교함을 폭로시킬 수가 없다. 기성 교회들이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만 부각시키고 거기서 더 나아가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본 제단은 한국과 세계 교회를 향해 성경에 계시된 삼위일체 속에서 특히 성부 여호와의 역사에 초점 맞추어 예수님의 재림을 변론하려 한다.
1. 재림하시는 예수님 앞에 교회가 애곡하게 됨
교회가 예수님의 유월절, 성령님의 오순절 역사를 사모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제대로 사모하고 섬길 때 반드시 성부 하나님의 초막절 역사로 인도될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을 진심으로 섬기던 바울이 은혜시대의 큰 종으로 인도된 원리와 같다.. 그러나 말세의 교회가 성경에서 경고한 여러 교훈에서 탈선하므로 자연스럽게 마귀를 교회로 불러들이게 되므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재림하실 예수님(=여호와)의 심판 역사(계시록)를 멀리하게 된 현실이 되어 버렸다.
요한계시록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재림주=몸을 입고 오시는 성부)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이렇게 되는 이유는 삼위일체의 역사 곧 성부, 성자, 성령의 역사를 구분해서 보거나 관통해서 볼 때 오는 다림줄을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2. 같은 예수님이지만 초림 예수님과 재림 예수님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교회
4복음서의 예수님은 요한복음 1:29절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어린 양 곧 죽임을 당하러 오신 제물이시다. 용서하시고 화해시키시고 낮아지시는 겸손의 주시며 구원자시다. 그는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신의 몸을 심판의 제물로 내어 주신 분이시다.
요한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마가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사야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성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성자)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성부는 무서운 심판주시고 성자는 은혜의 주님이라고... 은혜로운 주님이 오심으로써 구약의 무서운 율법적 하나님은 사라지고 사랑과 용서의 기독교가 세계를 정복했다고... 그러나 이러한 믿음으로써는 재림주님을 영접할 수 없다. 예수님은 무서운 심판주로 다시 오시기 때문에 위와 같은 믿음은 마귀가 원하는 믿음밖에는 안 될 것이다. 신약의 예수 사상이 구약의 여호와 사상을 이기고 진화한 것이 아니라, 구약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여지기 위하여 아들 예수께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며 모든 일을 진행하시는 것뿐인데, 기독교는 자신의 입에 단 것만 받아들이고 있고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믿고 가르친다.
기독교는 초림주의 역사로 끝을 맺는 것이 아니라 성부께서 심판을 아들에게 맡겼다 하셨으므로(요 5:22) 재림 예수님의 역사로 끝을 맺게 되는데, 범인이 바라는 대로 끝까지 은혜롭다가 끝나는 것이 아니요, 끝까지 전쟁이 있다가(단 9:26) 심판으로 끝나면서 새 시대로 넘어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실 때는 아무도 심판치 아니하시고 도리어 자신을 심판의 제물로 내어주셨으나, 이제 다시 오실 때에는 성부 아버지께서 위임해 주신 심판권세를 가지고 오시기 때문에 2천년간 기독교가 알고 있던 그런 예수님의 이미지와는 크게 괴리된 모습으로 다시 오시는 것이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교회가 계시록과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3. 신구약의 대표 종들이 재림 예수님 앞에서 어떻게 되었던가?
사도요한과 다니엘이 다시 오실 재림주 형상 앞에 힘없이 쓰러진 것만 보아도 은혜시대의 영계로서는 재림주를 맞이하기는커녕 그 앞에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죽은 시체마냥 쓰러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한계시록 1:17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다니엘 10:8 "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이 큰 이상을 볼 때에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 9 내가 그 말소리를 들었는데 그 말소리를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었느니라"
신구약의 최고 영계를 자랑하는 두 종이 저 지경인데, 어찌 현실의 기독교는 재림주 영접을 그렇게 손쉽게만 생각하는가? 계시록쯤은 몰라도 구원에 지장이 없다는 사상이 교계에 팽배해 있는데, 다니엘과 요한 사도가 보고 있다면 아마도 크게 책망할 것이다. 은혜로우시던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다시 오실 때에 저렇게 변하신 것은 공의의 심판을 행하러 오시기 때문이다. 심판이란 단어를 교회는 매우 듣기 싫어하는데, 무서운 심판이 임하는 것은 좋게 할 수 있음에도 하나님이 엄하셔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악이 하늘에 사무칠 정도로 악하고 강하여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을 인류의 죄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불의를 용납할 수 없는 게 공의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알 것은 온화하신 어린 양 예수는 그 모습 그대로 재림하시는 게 아니라는 것! 이것을 깨닫고 다시 오실 예수님의 심정에 맞추어 신앙 생활을 하는 자들이 전 세계적으로 144,000명인 것이다.
3. 어린 양의 피에 따라오는 성령의 인침 외에 하나님의 인을 맞아야만 재림 예수님과 시온산에 설 수 있음
요한계시록 14:1 "또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구약 성경을 보면 예수의 이름은 나타나지 않고 오직 여호와의 이름만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여호와라는 칭호가 사라지고 모든 초점이 아들 예수께로 수렴된다. 독생하신 하나님인 예수의 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들이 십자가 제사를 다 이루어 완성하시고(요 19:30) 부활의 승리를 얻은 후에는 아들도 이제 아버지 여호와의 이름 영광을 위하여 일하시게 된다. 디시 오실 때의 목적은 오직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 하나뿐이다. 여호와의 영광을 방해하는 세력을 붉은 용부터 정치, 종교세력까지 싹 심판하고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천지를 충만케 하기 위해 다시 오시는 분이 재림 예수님이시다.
4. 시온산에 서려면 3대절기에 감취어진 삼위 하나님의 역사를 다 받아야 함
구약 성경에는 3위 하나님의 사역을 3대 절기 속에 비밀로 계시하셨는데, 유월절(성자), 칠칠절=오순절(성령), 초막절=수장절(성부)의 3대 절기가 바로 성부, 성자, 성령의 고유한 이름 역사이다. 각 이름에 합당한 위격의 역사가 창세 전부터 예정되어 있어 그대로 때에 따라 이루시되 세 위가 합쳐진 한 하나님으로서 일하시는 것이 삼위일체의 신비이다.
유월절은 성자의 이름이 드러나지기 위한 역사요, 오순절은 보혜사 성령께서 예수가 뿌린 씨앗을 성부 앞에 알곡으로 바칠 때까지 길러주시는 역사요, 초막절은 성부 여호와의 이름이 만천하를 통일함으로 모든 것이 완성되는 절기이다. 이 때에 가서야 하나님이 누구신지 예수가 왜 초림, 재림 두 번에 걸쳐 오시는지, 여호와의 이름 역사는 신구약을 거쳐서 어떻게 전개되어 온 것인지가 완전하게 드러난다. 삼대절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 역사요, 세 이름 중 어느 하나의 역사도 누락될 수 없는 것이다. 한 위의 역사가 진행될 때(때에 따라) 나머지 두 위는 그 한 위와 하나의 본체로서 그 역사를 완성되도록 도우시는 것이다
5. 성부와 성자 부자 간의 관계
부자간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1) 아버지 하나님은 스스로도 하실 수 있지만 모든 일을 아들을 통해서 하시고 영광도 아들을 통해서만 받기를 원하신다.
2) 아들 예수는 인간 세계에 오셔서 아버지만을 알리시고 아버지께 영광 돌리는 일에만 100% 전념하셨다. 다시 오실 때에도 아예 아버지의 분신으로 오시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를 영광스럽게 하시고 서로가 서로의 완전역사로 상호 간에 완전함에 완전함으로 더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러 오실 때는 종의 신분으로 낮추어 오셨지만 부활승천 하시어 보좌에 오르셨다가 다시 오실 때에는 성부 하나님을 그 부활한 몸속에 담고 오시는 것이다. 이사야 9:6절을 보라. 한 아기(예수)가 태어나셨는데, 그 이름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기록되어 있다. 아기 예수의 이름이 어떻게 "영존하시는 아버지"란 말인가! 예수는 그 위격이 성자인데, 어떻게 성부의 위격에 해당하는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는가 말이다. 이 부분이 바로 3위1체의 신비이자 여호와와 예수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예수님은 초림 때에는 성부의 종으로 오셨다. 그러나 재림 때는 엄위하신 성부 하나님 자체가 되어 오시는 것이다. 사 9:6절 다섯가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말이다. <예수=여호와>라고 하면 신학적으로 위험하다고 많은 태클이 들어오겠지만, 원래 두 분은 창세 전부터 하나이고 동등 본체이시다. 우리 머리가 작아서 문제가 되는 것이지, <여호와=예수>라는 도식은 성경이 알려주는 진리이다. 그러나 <창세 전 예수님>과 <부활 승천 후 예수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하나 있다. 창세 전 예수님은 영으로서 살과 피가 없었지만, 부활 후 예수님은 살과 뼈가 있으시다.
눅 24: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예수님은 창세 전에 지니시던 신의 영광만으로도 부족함 없이 모든 것이 충분했다. 그런데 그분이 낮아져 인간세계에 오신 것은 피조물로서는 감히 참여할 수 없는 신의 영광에 피조물을 참여시키려는 하나님의 작정 때문이었다. 바로 인간 사랑이다. 성은이 망극하다는 것은 이럴 때 할 말일 것이다. 마귀는 이것이 싫었던 것이다. 본래 썩을 것은 썩지 않을 것을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고, 피조물은 조물주의 자리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런데 이걸 가능케 하려고 조물주가 쓰신 방법이 바로 십자가와 부활이다. 공의는 죄를 죽여 버리기에 선악과 따먹고 죄가 흘러들어온 육체로서는 공의의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으니, 죄의 빚을 청산해야 하나님과 교제가 될 수 있는데 청산할 돈이 없음을 아시고 불쌍해서 대신 청산해 줄 만한 방법을 찾으신게 바로 시편 40:7절이요, 이사야 53장이요, 시편 22편이요, 창세기 22:16~18절이다.
인간을 신의 성품에 참여시켜 함께 기쁨을 누려보자는 하나님의 계획을 첫째 아담이 불순종하므로 망쳤으나 아버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마지막 아담 예수님께서 순종하심으로 이루어 드렸던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어 신의 성품에 참여시키길 기뻐하셨으나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뱀의 종이 되므로 다시금 말씀에 순종하는 인간으로 하나님과 동거동락하는 자리에 들어가게 하려 하실 때, 우선은 당신이 사람되어 오시어 모든 죄와 사망의 결박을 풀어 버리는 십자가 제사를 완성하여 부활로 승리하신 것이고, 아들 예수가 한 것처럼 그 뒤를 좇아 순종하는 순교자와 그 동무 종들을 모아 아들과 결혼시켜 신의 성품까지 끌어 올려 무궁한 천국을 누리되 각자의 행한대로 상급이 따라오는 완전한 세계를 이룬다는 그 목적 하나로 이제까지 6천년간의 역사가 흘러온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완전한 신으로 계서도 부족함이 없으시나 당신의 피조물인 사랑하는 인간을 당신의 성품에까지 참여시켜 함께 에덴(기쁨)을 누리고 싶으셨던 것이다. 신의 인간 사랑 때문에 오늘날의 기독교가 탄생한 것이며 육에 속하였던 우리 인간이 썩지 않는 영원한 신의 형질을 받아 그에 합당한 세계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게 된 것이다. 마귀가 아무리 이방 종교를 창조하여 흉내내 보려 해도 절대 흉내닐 수가 없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이다.
6. 재림 예수님은 여호와신가?
재림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과 같다고 말해도 되는지를 다음 예언을 통해 상고해 보자.
이사야 63:1 "에돔에서 오며 홍의를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자가 누구뇨 그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자가 누구뇨 그는 내(=여호와)니 의를 말하는자요 구원하기에 능한 자니라 2 어찌하여 네(=재림의 심판주)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 틀을 밟는 자 같으뇨(=심판주=재림예수 / 계 14:14~20 심판으로 피 묻은 예수님) 3 만민 중에 나와 함께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을 인하여 무리를 밟았고 분함을 인하여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뛰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4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 구속할 해가 왔으나 5 내가 본즉 도와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히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 6 내가 노함을 인하여 만민을 밟았으며 내가 분함을 인하여 그들을 취케 하고 그들의 선혈로 땅에 쏟아지게 하였느니라"
위 예언에는 "내가"가 있고, "네가"가 있다. "내가"는 구약 성경을 기록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네가"는 심판함으로 의복이 피에 젖은 재림 예수님이시다. 성부가 성자를 향해 "네 의복이 왜 그렇게 붉게 되었느냐?" 물으시면 성자 예수께서 "예 아버지, 심판할 때 피가 튀어 그렇습니다" 해야 할 것인데, 이상하게도 질문하신 성부께서 대답까지 혼자 다 해 버리신다. 하나님 혼자 자신을 향해 묻기도 하고, 자신이 대답하기도 하신 것이다. 이상하지 아니한가? 세상에 무슨 이러한 대화가 있는가?
이 말씀은 B.C. 750년경 이사야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묵시로 하늘의 비밀을 계시하신 것이다. 성부께서는 보좌에 영으로 계시며 예수님은 성부 우편에 말씀으로 계실 때이니 아직 이 땅에 초림하지도 않으셨던 때이다. 그런데 본문의 홍의를 입고 심판으로 인하여 옷에 피가 튀어 붉게 된 분은 계 14:14~20절의 재림 예수님이다. 만일 재림 예수님도 초림 예수님처럼 철저히 낮아진 종의 신분이라면 성부 아버지의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어졌냐는 질문에 초림 예수님처럼 아버지라 부르며 겸손히 대답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위 이사야 63장의 답변을 보면 초림주의 영이 아니다. 저 답변은 결코 낮은 위치가 아닌 동등자가 동등자에게 하는 어투이다. 사실 동등한 두 신격의 대화라기 보다 하나의 신이 독백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예언을 주실 때로부터 3700년도 더 지나 예언이 성취되기까지의 긴 세월 동안 예수님의 위치에 분명 변동이 있었던 것이다. 분명 종으로 오셨던 초림주의 모습과는 달리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과 동등이 되어 계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약의 바울의 글을 보니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다.
빌립보 2:6 "그(성자 예수)는 근본 하나님(성부 여호와)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것은 무얼 의미하는가? 원래 동등이었던 성부와 성자이셨으나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애초에는 없었던 인간의 몸을 부활을 통하여 입고 다시 예전의 완전 영화로우신 하나님의 자리로 되돌아가 계신 것이다. 썩는 물질로는 썩을 수 없는 신의 형상을 이룰 수 없기에 썩지 않는 부활의 몸으로 하나님의 본래 자리로 다시 올라가신 것이다. 인간도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친히 증명하시되 첫 아담은 뱀에게 속아 실패했기에 하나님의 친히 마귀를 이길 계획을 완전하게 짜서 홀로 단독적으로 일을 완수하신 것이다. 1인 연출, 1인 감독, 1인 배우인 것이다. 그런데 인자로 오셔서 해내셨기 때문에, 인간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희망의 문을 열어주신 것이다. 이 문을 통해 들어간 자들이 바로 과거 순교자요, 오늘날에는 144,000명인 것이다.
인간이 못하니 여호와 하나님이 대신 해주셔야 하는데, 신의 성품으로도 마귀를 없애 버리고 세상을 당신이 원하는 대로 재창조 할 수 있으나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인간에게 배역을 좀 시키시고 나중에 상도 주시기 위하여 신의 자격으로서 하지 않으신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시켜봤자 못할 줄 아시므로 당신이 친히 더러운 인간 수준에까지 떨어지셔서 이렇게 하면 된다는 본보기를 완성하고 가신 것이 초림주의 역사이다. 초림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우리를 위하여 격을 낮춰오신 하나님이요, 알아도 모른다고 해야 하는 하나님이요(마 24:36), 지극히 선하시면서도 자신에게는 선하다 못하게 하시고 아버지만 선하다 하라 명하신 그런 하나님이셨다(마 19:17).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신 행동만 보아도 <초림주=여호와>라는 공식은 성립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재림주=여호와>라는 공식은 다르다.
7. 인류 역사는 여호와 하나님이 연기하시는 독무대, 도와줄 연기자가 없어 홀로 연기하시다!
이사야 44:2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나와 함께한 자 없이 홀로 하늘을 폈으며 땅을 베풀었고..."
요한 1:1 "태초에 말씀(=신성 예수)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성부)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말씀=예수)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 14 말씀(=신성 예수)이 육신(인성 예수=인자)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18 본래 하나님(=성부)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인성 예수=인자)이 나타내셨느니라"
위의 두 예언은 언뜻 보면 모순처럼 보인다. 이사야 44:24절에서는 "함께 한 자 없이 홀로 하늘과 땅을 지었다"고 하셨는데, 요한복음은 독생하신 하나님이신 예수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셔서 그 분과 함께 천지를 다 짓되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고 증거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정확무오한 완전영감의 신의 책임을 믿는다면 위 말씀은 모순이 아니요, 성부가 바로 아들 성자이심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빌립보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라는 말씀도 정확하고, 이사야 63장의 "내가"와 "네가"라 기록된 두 존재의 대화가 1인의 독백체로 기록된 이유도 다 풀리게 된다. 초림주로는 분명 여호와와 동등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심판주에 관한 모든 예언들을 상고해 보면 재림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심판을 행하신다고 수없이 예언해 오신 여호와 하나님의 모습과 똑같다는 걸 알 수 있다.
렘 30:21 "내가 그를 가까이 오게 하므로 그가 내게 접근하리라 그렇지 않고 담대히 내게 접근할 자가 누구뇨 여호와의 말이니라 22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23 보라 여호와의 노가 발하여 폭풍과 회리바람처럼 악인의 머리를 칠 것이라 24 나 여호와의 진노는 내 마음의 뜻한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쉬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말일에 그것을 깨달으리라"
분명 인간 종말이 되면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로 악인이 전멸하는 심판역사가 있을 것과 하나님의 진노(보수)를 말일에 우리 인간들이 완전히 깨닫는 때가 온다고 하셨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인간 종말의 시기를 살면서 예수님의 본체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에는 관심도 두지 않는 것일까? 오히려 전하는 자들에게 분노만 쏘아댄다. 어찌하여 은혜로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오실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은혜에만 머무르다 도리어 은혜주신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는 것일까? 마귀가 그만큼 간교하게 교회를 미혹시키고 있다는 증거이다. 미혹의 방법은 바로 <초림주=재림주> 이렇게 믿게 하려는 것이다. 초림주를 대하던 마음으로 재림주를 고대하다가 망하게 하려는 것, 그것이 마귀의 원하는 바이다.
8. 예수를 믿으면 다 증인인데, 초림주의 증인이 될 것인가? 재림주의 증인이 될 것인가?
요한계시록 17:6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바르게 증거하면 예수의 증인이요, 바르게 증거하는 소리가 듣기 싫어 살기를 느낀다면 그들의 영계는 음녀 영계인 것이다. 지금은 무서운 전쟁이다. 영적 전쟁! 말씀 하나 바로 전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내 주인이 마귀냐 하나님이냐로 판가름되어 심판을 면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심판은 미래의 어느 순간에 되어질 장래 일이 아니다. 지금 이미 척량의 먹줄이 한국강산으로, 세계로 번져나가고 있으므로 조용히 심판이 진행중인 것이다. 눈에 보이는 심판이 행해질 때는 이미 보이지 않는 영적 척량이 다 끝난 뒤인 것이니 그 때 가서는 다시 척량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너무 늦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지금이 중요하고 오늘이 중요하다. 하루하루가 전쟁이다. 지금 애써 전쟁하지 않으면 나중에 비참해 진다.
아모스 8: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12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13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
육적으로 진행될 때는 이미 늦다는 증거이다. 아마 억울도 할 것이다. 그래도 예수 믿고 성령 받고 봉사하고 섬기고, 새벽기도도 나가고 주님의 재림도 소망했는데... 어찌 하나님은 일을 이 따위로 진행하느냐고... 은혜와 진리의 하나님, 온유 겸손하신 하나님은 이렇게 잔인하고 비참하게 일을 처리하시는 분이 아닐 거라고... 그래서 그들이 144,000명의 전도와 증거를 듣지 않는 것이다. 권세 역사가 강하고 심판이 냉혹하게 들리므로 그들은 그것을 예수님의 사랑 역사에서 벗어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 북방환란, 3차대전, 아마겟돈을 말하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매도하며 결국 살라고 주신 촛대교회로 들어오지 못하고 개인적인 신앙만 어떻게든 보존해 보려다가 '후 3년 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 빠져서는 비참한 자신과 식구들, 특히 노부모나 어린 것들이 먹을 것이 없어 주리는 것을 보면서 회개하기보다는 더욱 강팍해져서 하나님을 저주하면서 흑암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이사야 8: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21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주릴 것이라 그 주릴 때에 번조(煩燥)하여 자기의 왕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 22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 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중으로 쫓겨 들어가리라"
무서운 예언 아닌가? 초림주만 사모하고 초림주의 교훈만을 가지고도 종말의 환란을 이겨낼 수 있다면 하나님은 굳이 계시록을 주시지 않았을 것이며, 계시록에 무서운 재림주의 형상을 하시고 사도요한에게 나타나지도 않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요한 사도에게 나타나 엄위하신 모습으로 장차 될 일을 기록케 하신 것은 "이런 모습으로 와서 이렇게 행할 테니 잘 준비하여 나중에 내가 다시 올 때 나와 만나 결혼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현재 기독교가 취해야 할 신앙의 방향인데, 예수의 피로 산 본 백성이 듣지 않으므로 촛대가 이방으로 옮겨갈 판이다. 말씀이 딱딱하고 무섭다고 해서 무시하다 죽을 것인가?
예비처에 들어간 자들은 딱딱하고 무섭지만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전하던 증인들의 경고를 두려워하였으므로 예비처로 인도받았던 것이다. 성경도 몰랐고 예수도 몰랐던 자들 중에 이 말씀을 따라올 자가 더 많다고 계시록 7장에 예언돼 있다. 본백성(기독교)이 버리므로 이방인들이 주워먹고 들어간 것이다. 그곳에서 새 시대 천년간 사망이 없는 삶을 살기 위해 피를 정결케 하는 역사를 받게 된다(사 4:4). 율법과 증거의 말씀(율법과 시편과 예언서)이 얼마나 중요했다는 것이 '후 3년 반'과 '예비처'로 나뉘어진 두 곳에서 명백히 깨달아지되 하나는 축복 속에서, 하나는 저주 속에서 깨달아지는 것이다. 왜 이렇게 나뉘었는가? 초림주의 신앙으로 재림주를 대했느냐? 재림주를 영접할 준비를 하였느냐로 갈렸던 것이다. 지금은 재림주 영접할 준비를 해야 할 때이다. 그리고 그 핵심은 다시 예언이며 새 일이다. 새 일은 이사야 42:9절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고하신다 하셨다. 그리고 재림 예수님은 우리더러 다시 예언하라 하셨다. 그러면 다시 예언하는 종들은 여호와의 종들이기도 하고 재림 예수님의 종들이기 한 것이다.
계 11:3절에 예수님은 당신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신다. 사 43:10절에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증인들을 택하신다.
<여호와의 증인 = 예수님께 권세 받은 두 증인> 이런 공식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 8:20 "자기의 왕 자기의 하나님"이란 만왕의 왕 예수님이자 성부 여호와가 되는 것이다. 초림 예수님을 사모하고 섬겼다는 기독교회가 재림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 위 예언처럼 되기 때문에 안타까운 것이다. 마치 율법을 소유하고 모든 선지자와 예수님을 배출한 유대민족이 영혼구원을 받지 못하고 지옥의 자식이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지금은 초림주의 증인으로 신앙생활 할 때가 아니라 재림주의 증인이 되어야만 올바른 신앙생활이 되는 것이다.
9. 삼위일체의 핵심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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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
신약 |
심판기 |
하나님의이름 |
여호와가 대표 (성자와 성령은 저 이름 안에 계심) |
어린양 예수가 대표 (성부와 성자는 저 이름 안에 계심) |
어린양의 이름+아버지의 이름 (계 14:1) 합하여 온전히 드러남 |
여호와 (초막절 심판기) |
삼위 하나님이 여호와로 통칭됨. 아들과 성령의 역사는 그림자적으로 곳곳에 계시는 되나 여호와 하나님만 등장하며 모든 역사를 하심. 하나님(여호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함(아직 아들의 역사가 없으므로). 여호와가 주인공. 장차 될 모든 것을 예표적으로 보여주며 성경을 기록케 하심. 성부를 통해서만 아들과 성령이 계시되고 실제로 아들과 성령이 땅 위에 나타날 때까지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지휘 허락하심. 하나님 여호와는 심판기에 '여호와'라는 이름이 불려지기를 원하심. 사 43:1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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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유월절 파종기) |
아들 예수를 통해서만 성부와 성령이 소개되고 계시됨. 예수를 통하지 않고서는 성령도 못받고 아버지 자체를 알 수도 없음. 예수가 주인공. 하나님을 아는 것부터 경배하는 것까지 예수라는 통로를 통하지 않고는 접근 불가능. 예표적으로 기록된 구약 모든 예언을 다 이루심(요 5:39). 엄밀히 보면 인류역사는 하나님 당신이 기록하고 당신이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독무대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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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오순절 양육기) |
주의 영이므로 성령을 통하여 성부와 성자의 역사가 완성됨. 여호와의 말씀이 예언자들에게 전해질 때도 예언자들이 주의 신(성령)에 감동되어야 가능. 아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그 피를 믿는 것도 성령이 오셔서 만져주셔야 가능. |
결 론
인간 세상에서도 아들이 어떤 일을 뛰어나게 처리하여 영광이 돌아올 때 모든 영광을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께 돌리는게 효자의 모습이다. 또한 본인이 다 계획하고 일구고 키워 놓으시고 (잘 되도록 뒤에서 돌봐주셔 놓고도) 아들이 잘 돼서 이웃이나 세상에서 칭찬받으면 그걸로 마치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하는 것이 부모 마음이다. 아들이 잘하는 것을 곧 자신의 이름과 가문이 잘 되는 것과 동일시하여 기뻐하면서 모든 문제를 아들을 통하여 처리하고 뒤에서 흐뭇해 하시는 것이 인간 세계의 부모다. 인간이 이와 같은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이다. 성부께서는 아들 예수가 하기를 원하신다. 아들 예수는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기를 원하신다. 성령은 어머니처럼 중보하신다. 아버지와 아들의 일을 가운데서 도우신다.
표에서 보듯이 지금까지는 유월절과 오순절 두가지 역사만 이루어졌다. 아직 성부의 역사인 초막절(심판기)이 남아 있다. 마귀는 그런건 없다는 것이다. 성부 여호와는 과거의 신이지 이제는 예수가 있지 않느냐는 것이 마귀소리다. 복음서와 편지서로 은혜받기 충분하니 구약의 예언서나 율법이나 요한계시록에 너무 심취하지 말라는 것이다. 위험할 수 있으니까... 완전히 마귀소리다! 마귀는 교회가 마지막 남은 초막절기의 축복을 받도록 가만히 놔둘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온 세계에 흑암을 덮어 교회의 눈을 가려놓고 신약의 예수만 쳐다보게 한다. 공의의 하나님 아버지가 온 인류 앞에 높아지는 것을 반대하며 여호와는 이스라엘 지역의 전쟁의 신이요, 지방신이라고까지 하는 신학자의 무리까지 나와 있는 실정이다. 예수가 그 옹졸하고 범위 좁고 무섭기만 한 여호와의 중동지역의 지방신 색깔을 세계적으로 넓혀 놓았으니 예수님만이 완전한 신이요, 여호와는 사랑과 용서를 시행하지 못한 보복의 신, 전쟁의 신, 자신을 반대하는 민족을 전멸시켜 버리는 잔인한 신 정도로..... 그렇게 몰아가는 것이 마귀가 하는 일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구약을 읽고 계시록과 예언서를 사모하는 성도들까지 성령 받지 못하고 온화하지 못하고 이방 종교를 포용할 줄 모르는 문제아들로 매도하는 것이다. 3차대전이나 말하고 아마겟돈이나 말하는 전쟁광처럼 몰아가는 것이 다 마귀가 하는 짓이다.
우리 새일성가에 <여호와>가 그렇게 많이 나오는 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이 불려지고 경배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2천년간 하나님은 독생하신 하나님, 즉 예수를 통하여 영광을 받아오셨다. 그렇게 해야 성부 하나님의 마음이 기쁘셨던 것이다. 이제 여호와의 이름이 세계 만방에 높아지고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 덮음같이 세상에 충만해지며 여호와가 세계를 통일하시고 새 시대에서 그 이름이 높아지실 때, 아들 예수는 어떠할까? 이 일을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의 참된 종이라면 여호와의 이름 영광이 높아지는 일에 마지막 해산 수고를 다해야만 할 것이다. 그것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통일된 세상에서 만왕의 왕 예수님께 사랑받을 조건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여호와>라는 당신의 이름으로 이방신을 멸하시고 성도의 나라를 건설하시려고 때가 되매 1974년 9월 24일에 본 제단을 세우시고, 성부 하나님의 초막절 역사와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 영광을 높이는 일을 위해 우리에게 사명을 맡겨주셨다. 본 제단에 연합된 성도들은 인류 최후의 마귀 세력과 싸우기 위하여 심판기의 역사를 잘 이해하고 3위1체를 말할 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이름이 불려지기를 간절히 원하신다는 것을 전해야 할 것이다.
2천년간 독생하신 하나님 예수의 은혜시대가 이어져 왔지만 이제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이 여호와라고 알려주신다. 다시 오시는 신랑주 예수가 바로 여호와라는 것을 우리 제단을 통해 온 세계가 알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여호와 앞에 힘써 합심 호소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달라신다. 지구상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여호와라 부르며 직접 성가로 호소하며 주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되 모든 사상이 여호와의 새 일 사상으로 가득차 기도하면 하나님은 들어주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한 무리가 바로 새 일의 무리 144,000명이다.
우리 교단의 이름이 기독교 혹은 예수교가 아닌 것은 창피한 일이 아니다. 여호와 새일 교단은 이단으로 낙인 찍힌 수치스런 이름이 아니라, 인류 역사상 가장 보배로운 교단이며 가장 막중한 사명을 감당해야 할 순교자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인 것이다(계 6:11). 마귀가 가장 미워하는 교단이 여호와 새일교단이요, 재림주(여호와)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단체가 바로 여호와 새일교단인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이름 영광 중 마지막 남은 <여호와>의 이름이 높여질 때가 왔다. 인류 역사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직접 부르며 그를 증거하기 위하여 순교하므로 승리하는 첫 무리가 바로 144,000명 새 일의 용사들인 것이다. 이들의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있는 것은 다시 오실 재림 예수님이 바로 여호와라는 비밀을 깨달은 자들이 인류 역사상에 이들 144,000명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기독교 성도들(초림주 영접하여 영혼구원받은 자들)은 <초림주=재림주>라는 어린아이 신앙으로 응석부리고 까불며 옆집아이(음녀세력)와 뛰어 놀다가 북방에서 쏟아지는 끓는 가마물을 뒤집어 쓰고 크게 아파하는 것이다. 그 화상이 다 아물 때까지는 천년이 소요된다. 이 일을 당치 말라고 주신 책이 작은 책 계시록이며 초림주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산 책의 핵심판이 바로 요한계시록이다. 초림주가 피로 사시고 재림주가 책대로 시행하러 오시는데, 시행하러 오시는 분의 영계는 성부 여호의 영계라는 것이다. 이제는 심판하러 오시기에 심판당하러 오신 초림주의 영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복잡하고 어려운 교리가 아니다. 쉽고 당연하므로 겸손히 받아들이면 복받는 교리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할렐루야 영광을 세세토록 받으시옵소서. 아멘